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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랑기부제 매거진

현충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 운동가들

  • 2026.06.05
  • By 콘텐츠팀

 

현충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


▶ 이미 지나간 역사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치열했던 나날들을 되짚을 때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쟁의 포화 속을 걸어갔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충탑에 이름이 새겨지지도, 교과서에 기록되지도 않은 이들도 있다.

평범한 청년들, 의료진,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 이들은 묵묵히 희생을 감내했고, 부상의 고통을 겪었으며,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다가오는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다 함께 추모한다. 그들의 헌신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가슴속에 기억하는 한, 그들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최재형: 독립의 길에 온기를 불어넣은 소리 없는 페치카



(사진 출처=국가보훈부)

현충일은 단순히 전쟁터에서 희생된 이들만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꿈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불태워 따뜻한 온기를 지폈던 '시베리아의 페치카' 최재형 선생 같은 소리 없는 불꽃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전하는 날이기도 하다.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9살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후 군수업과 도로 공사로 연해주의 전설적인 거부가 되었으나, 그 막대한 부를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았다. 민족 교육의 기틀을 닦고, 독립의 길을 여는 삶을 택했다.

영하 30도의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 속에서 그는 고통받는 한인 이주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는 따뜻한 '페치카(난로)'와 같은 존재였다.

자본을 독립의 무기로 바꾸고 교육과 언론, 외교 전반을 뒷받침했다. 군납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기꺼이 독립군의 군량과 군자금으로 썼으며, 1908년에는 안중근,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 부대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언론의 전선에서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항일 투쟁의 불꽃을 이어갔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의 최전선에서 총을 겨눈 영웅이었다면, 최재형 선생은 그 거사가 가능하도록 뒤에서 받쳐준 후원자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쓰인 브라우닝 권총을 구입해 전달하고, 거사 전 안중근 의사가 훈련할 장소와 가족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혹독한 심문 속에서도 그의 이름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은 것은, 그의 존재가 독립운동에서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최재형 선생의 희생은 1920년 4월 참변 당시 절정에 달했다. 일제의 잔혹한 소탕 작전 앞에서도 그는 피신하는 대신 죽음을 마주했고, 그해 4월 7일 순국했다.

오늘날 우리가 민족의 영웅들을 기릴 때, 자신의 재산을 독립의 무기로 바꾸고 따뜻한 인류애를 민족 단결의 힘으로 승화시킨 이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회영: 돌밭에 독립의 씨앗을 뿌린 사람


(사진 출처=국가보훈부)

역사 속 수많은 영웅 중에서도 우당 이회영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장 위대하게 실천한 인물로 기억된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여섯 형제와 함께 부귀영화가 보장된 삶을 기꺼이 포기했다. 99칸 대저택을 비롯한 모든 가옥과 토지를 처분하여 마련한 현재 가치 약 60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독립 자금으로 삼아 만주에 항일 투쟁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

황량한 삼원보의 들판 위에서 이회영 선생은 총을 들고 최전선에 서는 대신 척박한 땅에 독립의 씨앗을 뿌리는 개척자의 길을 택했다. 그에게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하여 한인들이 척박한 땅을 일구며 생존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자치 공동체를 구축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그 독립의 꿈이 잉태되고 자라난 요람이었다.

'교육은 독립의 뿌리'라는 신념 아래 세워진 이 학교는 이후 3,500여 명의 정예 독립군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청산리 전투와 같은 빛나는 승리를 일궈낸 씨앗이 되었다.

조선 최고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으나, 끼니를 거르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운명을 위해 남은 모든 것을 바쳤다. 한때 대부호였던 그는 결국 1932년 대련에서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눈에 보이는 재산이 아니라, 그가 정성을 다해 길러낸 수많은 독립 영웅들이었다.
 

⊙윤희순: 전장에 피어난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사진 출처=국가보훈부)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16세에 춘천 의병장의 며느리로 시집간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라고 외치며 여성들의 항일 의식을 일깨웠고,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다.

군량과 탄약이 바닥났을 때, 그녀는 여성 30여 명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놋쇠와 구리를 구입해 화약을 직접 제조했다. 집안의 부엌을 항일 탄약 제조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황량한 만주 땅에서도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학당을 설립하여 독립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에게 교육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장기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윤희순 선생은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가문의 희생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일제가 아들을 볼모로 잡고 시아버지의 거처를 밝히라고 협박했을 때에도 단호하게 맞섰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의 여정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 가르침을 담아 '일생록'을 남겼다.
 

▶ 기억에서 행동으로

최재형은 독립운동의 따뜻한 버팀목인 '페치카'가 되기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고, 이회영은 후학 양성을 위해 명문가의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았으며, 윤희순은 붓과 총을 모두 쥐고 앞장선 여성 선구자였다.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비유한다면,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어둠의 시기 속에서도 독립이라는 신념을 묵묵히 심어나간 이들이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 세대는 평화와 자유라는 값진 결실을 누리고 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널리 알려진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을 넘어, 우리 가슴속에 깊은 감사함을 새기는 날이다. 이날의 의미를 온전히 되새기기 위해, 우리는 그 시절 묵묵히 씨앗이 되어준 이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고향사랑기부제로, 그 마음을 이어갈 수 있다. 

이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일은 추모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국가보훈과 관련된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그 정신을 이어가는 방법 중 하나다.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부터 보훈가족 복지 증진, 지역사회의 돌봄 사업까지. 전국 곳곳에서는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으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노진호 기자

jinho@fairtrave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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